나는 울 엄마의 엄마랍니다
2014년 4월 12일 ~ 울 엄마의 엄마가 된 날 이른 아침부터 800평 밭에 20키로 씨감자 14박스를 심었다. 농촌의 고령화 일손 부족으로 날로 영농환경을 어렵게 만들어 가족의 일손이 꼭 필요하다. 다치기 전에는 엄마의 일손이 엄청 도움이 되었는데 올해는 방안에서 상상의 감자를 심는다. 오늘 감자 심는다고 신신당부하고 이른 아침 밭으로 향하는 마음이 가볍지 않다. 틈틈이 아내와 교대로 집에 들러 엄마의 동정을 살폈는데 보따리를 싸고 풀고 있었다. 감자 정식을 끝나고 서둘러 집에 돌아왔다. 아니나 다를까 엄마는 똥을 싸서 혼자 해결한다고 이불이며 목욕탕까지 온통 집안을 엉망으로 만들어 놓았다. “엄마!” 하고 불렀더니 엄마가 메아리처럼 “응 엄마”하시며 천진한 미소를 보내시는 엄마! 순간 등골이 오싹했다. 엄마의 기억속에 그토록 이뻐하시던 장남인 내가 사라져 버린 것이다. “엄마! 왜 그래” 하며 다그치는 고함에 당황한 엄마의 슬픈 눈빛이 내 가슴을 파고든다. “어머니 괜찮아 천천히 엉덩이 들어.....” 악몽 같았던 지난 일 년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라며 당황해 하는 엄마를 아내가 달래 주었다. 그동안 고생한 아내가 고맙고 감사하고 미안해 뜨거운 눈물이 내 가슴 적신다. 그렇게 나는 오늘부터 울 엄마의 엄마가 되버렸다. 엄마가 어릴 때 내게 하신 것처럼 나도 울 엄마한테 든든한 나무 같은 엄마가 되어드리리라고 다짐해도 뭔가 더 슬퍼지는 날이었다. 2015년 4월 15일 ~ "이년들이 치매 옮긴다고 안 오나" 통증에는 진통제, 불면에는 수면제, 변비에는 변비약으로 최악의 상황을 감수하면서 하루에도 수십번 반복되는 일상에 우리의 인내심도 한계에 이르러 서서히 지치고 있었다. 그렇다고 포기 할 수 없는 현실 운명이라 생각하고 최선을 다하자고 다짐하였다. 휠체어에 태워 평소 다니시던 회관에 가서 동네 사람들과 만나고 또 밭에서 김을 매는 날은 신기하게도 지난날 있었던 일들이 생생히 기억하고 정신이 맑았다. 옥수수 모종을 심고 수확한 마늘을 엮고 참깨를 키질하는 솜씨가 예전과 전혀 변함이 없었다. 엄마에게 할 일을 주었더니 그 순간만은 전혀 아픈 사람이라 믿기지 않을 정도로 좋았다. 더 이상 정신이 혼미해지지 않았으면 얼마나 좋을까? 반드시 일어나 당신의 흔적을 찾아 주시길 간절히 바란다. 요즈음은 그토록 힘들게 했던 불면증도 차츰 사라지고 통증도 호전되어 식욕이 좋아지고 있었다. 종일 집에 있는 날 사람들이 오지 않으면 “야야~ 왜 사람들이 우리집에 놀러 안오노” “이년들이 치매 옮긴다고 안 오나”하신다. “엄마 아니야, 엄마는 치매가 아니야”하면서 엄마를 달래 주기도 하였다. 악몽 같은 일 년이 지나는 어느 날 창밖에는 함박눈이 펑펑 내리고 마당에 홍매화 나무에 참새가족이 옹기종이 정답게 속삭이는 모습이 오늘따라 너무 행복해 보였다. 우리엄마도 저 홍매화처럼 치매란 병마 속에서 올곶은 정신을 오래도록 간직했으면 얼마나 좋을까 하고 바래본다. 하루하루는 힘들지만 전혀 내색을 않고 뒤처리를 깔끔히 하고 엄마를 공양하는 아내의 일상을 보면서 아내가 너무 고맙고 감사해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평소 순대국을 유난히 좋아하시는 엄마와 아내를 위해 순대국밥을 먹으러 갔다. 메뉴표에 순대국밥 7,000원을 보시고는 문득 “삼칠에 이십일” “야야! 이만천원이네” 하신다. “우와! 울 엄마 최고!”우리는 박수를 치면서 엄마를 칭찬하였다. 2014년 2월 16일 ~ 내 마음에도 눈이 펑펑 간밤에는 유독 잠을 설쳤다. 엄마가 밤10시부터 계속 잠을 자지 않고 헛소리를 하신다. 집에 가자고 보채는 엄마, 심한 잠꼬대에 소변을 3번 연속 보았는데도 자꾸만 보챈다. 밤 2시경 깜빡 잠이 들었는데 엄마는 누구랑 전화를 하신다. “야야 내가 금순네 집에 놀러 왔는데 집에 가려고 해도 누가 데려 오지 않아 기다리고 있으니 형에게 전화해서 내 좀 데려 오라 해라” 기가 막힌다. 아침에 전화기를 확인하니 고향을 다녀간 막내 동생이랑 통화를 하였다. 밤낮을 가리지 않은 엄마의 증세에 악몽 같은 시간이 우리 부부를 힘들게 하였다. 도저히 참을 수 없어 “엄마 제발 잠 좀 자자”큰소리로 화를 냈다. 엄마는 슬픈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엄마의 슬픈 눈빛에 가슴이 찢어져서 아픈 엄마를 붙들고 엉 엉 울고 말았다. “엄마 ! 왜 그래 이러지마 나 힘들어 정말 힘들어"“엄마! 이러면 나 못살아 제발..." 메아리 없는 하소연은 내 가슴을 더 아프게 후벼팠다. 답답한 마음에 밖으로 나오니 날이 훤하게 밝아오는데 함박눈이 펑펑 내리고 있다. 2014년 3월 5일 ~ 그래도 봄은 오고 어느덧 긴 겨울이 지나고 꽃피는 계절 춘 삼월을 맞았다. 엄마의 몸 상태가 걱정되어 포항병원에 입원을 시켜 정형외과, 신경과 검진을 받았다. 오른쪽 다리마비와 통증은 골반골절이 완치되면서 신경 및 혈액순환이 원활하지 못해 일어난 현상으로 재활을 하면 충분히 고칠 수 있다는 의사선생님의 말씀에 눈물이 났다. 입원 3일 차 한결 컨디션이 좋은 엄마를 보면서 진작에 올 걸 후회하였다. “엄마! 이제 다리 고칠 수 있데 의사선생님이 엄마 다리 고쳐 준대...” 엄마를 완치 할 수 있다는 희망에 고무되어 아내와 나는 감격해 눈물을 흘렸다. 열아홉에 시집와 육남매를 낳고 마흔둘에 혼자되어 육남매를 키우며 파란만장한 질곡의 세월을 넘어 오셨는데 지난날을 생각하니 자꾸만 눈시울이 뜨거워진다. 2014년 3월 20일 ~ 봄이 오락가락 입원 15일 째 우리의 희망에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우고 있었다. 육신이 좀 괜찮으면 정신이 오락가락 하고 정신이 맑으면 육신이 아프다고 보채는 엄마, 현실을 망각하고 과거에 몰입하는 엄마는 자면서 죽은 사람을 부르고 고함을 치는 심한 잠꼬대에 같은방 환우들의 수면을 방해하였다. 심각한 치매 증상으로 도저히 진료가 불가능한 상태일까봐 맘이 무겁고 두려웠다. 이러다 돌아가는 것은 아닌지 엄마의 돌출행동이 두렵고 불안했다. 더 이상 몸도 정신도 망가지게 할 수 없다는 판단에 입원 16일 째 퇴원을 결정하였다. 일상복으로 입고 퇴원한다는 소식에 마냥 행복한 엄마의 미소에 가슴이 찡하다. 집에 오는 내내 차안에서 아내와 나에게 “야들아! 고맙데 내 너그들 공 안 잊는데” 좋아 하신다. 퇴원을 잘 하는 것인지 알 수 없는 엄마의 미래를 두고 아내와 나는 깊은 고민으로 머리가 복잡한 가운데 엄마는 정든 집에 도착하여 이웃들의 따뜻한 환영을 받는다. 정상은 아니더라도 남은여생 우리와 함께 행복했으면 얼마나 좋을까? 엄마로 인해 형제간에 우애에 금이 가는 일은 없어야 하는데 아우들아! 맘 상하지 말아 형은 지금 넘 가슴이 아프고 힘들다. 그동안 모두들 고맙다. 그리고 미안하다 저녁상을 받은 엄마 “ 애미야! 니가 좋다. 내 몸 낳으면 니 업고 다닐께” 하신다. 한때는 며느리를 그토록 못마땅해 하시던 우리엄마 이제야 현실을 아는 가 보다. 어이없다는 듯이 씩 웃는 아내는 안 업어도 되니 몸이나 빨리 나으시라고 다독인다. 2013년 8월 17일 ~ 하루에도 열두고개 거실에서 엄마와 함께 자는 데 밤9시쯤에 여동생이 전화가 왔다. “오빠! 고생 많지...” 엄마를 걱정하는 맘이 애잔해서 눈시울이 뜨겁고 가슴이 아파온다. 하지만 이따금씩 다른 동생네가 원망스러울 때도 있지만 어찌하랴! 긴 병에 효자가 없다고 엄마의 병으로 육남매 삶을 망칠 수도 없는 것을! 기력이 떨어진 엄마를 모시고 병원에서 영양제 주사를 처방하고 물리치료를 받았다. 한결 기분이 좋은 엄마 집에 오는 내내 “아들아 너거들이 내 때문에 고생 한다” 하시며 모처럼 맑은 정신으로 자신의 처지를비관하고 눈물을 흘리시며 처지를 한탄하신다. 저녁에 마루 소파에 앉히고 TV를 보면서 최대한 침대에서 시간을 줄여야 한다는 판단에 엄마 기분에 맞는 얘기를 하며 붙들어 놓았다. 기력 회복을 위해 아침은 전복죽으로, 저녁은 어제 구운 소뼈 도가니탕을 드렸더니 맛있게 드셨다. 어쩜 지금부터가 엄마의 남은 삶을 결정하는 중요한 시간이다. 힘들어하시지만 엄마를 다독거려 다리운동을 최대한 시도하지만 곧장 포기하고 말았다. 앉은 채로 주무시는 엄마의 앙상한 얼굴을 보노라면 나도 몰래 긴 한숨이 흘러 나온다. 2013년 12월 22일 ~ 놀란 가슴을 쓸어내리며..... 새벽에 잠시 눈을 부쳤더니 잠이 부족했지만 오전에 있는 이장출무회의로 바삐 일어났다. 서둘러 엄마 아침을 먹이고 양치를 하고 소변을 누이고 자료를 준비해 집을 나선다. 밤부터 대설주의보가 내려 산간에는 폭설이 내리는데 다행히 이곳은 비와 진눈깨비가 내린다. 회의를 하고 있는데 전화기 너머로 엄마의 비명소리에 또 가슴이 덜컹 내려앉는다. 회의를 하다말고 집으로 달려오니 엄마 눈언저리에서 피가 펑펑 흘러내린다. 한쪽 다리 마비를 잊고 무심코 침대에서 내려오다 그만 넘어지면서 침대 모서리에 부딪치셨다고 하시면서 엉! 엉! 우신다. 엄마를 진정시키고 침대에 눕혀드렸다. 전화를 받고 급히 온 아내는 금방까지 함께 있었는데 그사이 사고가 났다고 속상해 하면서 침대에서 내려 올 때 조심해서 내려 와야 한다고 당부하며 엄마의 상처를 보듬어 주었다. 오후에도 진눈깨비를 동반한 비는 계속 내리고 있다. 저녁을 먹는데 서울 막내 동생이 엄마 걱정에 도가니탕을 바리바리 싸서 한숨에 달려 왔다. 동생네를 보자 어머니는 언제 그랬냐며 좋아라하셨다. 동생네 덕분에 모처럼 일찍 잠자리에 들었다. 2014년 2월 15일 ~ 형수님! 고맙습니다 아침부터 함박눈이 펑펑 내린다. 막내 동생네가 내려와 덕분에 맘 놓고 고추모종 육묘를 하였다. 엄마에 대한 동생의 지극한 효성이 고맙다. 움직임이 불편한 엄마의 모습에 애처로운 동생 걱정이 태산이다. 2박3일 짧은 일정의 휴가를 끝내고 동생은 떠났다. “형수님! 고맙습니다. 그 은혜 잊지 않겠습니다.”하며 아내의 손을 꼭 잡는다. 엄마를 뒤로하는 아우의 얼굴에서 슬픔과 회한으로 눈물 가득 담겨 있었다. 하루빨리 쾌차 했으면 얼마나 좋으랴! 오래 누워 있다 보니 엉덩이에 시커먼 욕창이 생기기 시작했다. 2013년 1월 14일~ 마른 하늘의 날 벼락 결혼 30주년 기념으로 아내와 같이 해외여행을 떠나게 되었다. “오빠! 여행가는 동안 엄마는 우리 집에 모셔놓고 여행 다녀와서 모시고 가! 엄마 모시느라 고생하는 올케한테 선물이라 여겨주고” 하면서 늘 엄마를 걱정하는 효심 깊은 막내 여동생의 기특한 제안에 “아! 그러면 되겠다.”하고 3박4일 여행을 다녀오는 동안 엄마를 서울 동생네 집에 모셔다 놓고 홀가분하게 처음으로 해외여행 길에 올랐다. 한겨울인 우리나라에서 여름인 동남아 여행을 끝내고 공항에 도착하니 새벽인데다 한겨울 추위와 시차 때문에 비몽사몽 몸도 맘도 순식간에 꽁꽁 얼었지만 엄마 걱정에 서둘러 동생에게 전화를 했다. “숙희야! 오빠다~ 공항에 도착해서 어머니 모시러가니까 집으로 내려가게 채비 좀 해줘" 선잠에서 깨어난 동생은 "응! 알았어" 짧은 통화를 끝내고 서둘러 동생네 집을 향했다. 그런데 잠시 후 동생으로부터 다급한 목소리의 전화가 왔다. "오빠! 엄마가 침대에서 내려오시다가 넘어졌어" "야가 뭔 소리하노...." 아~ 여행의 행복도 피로도 일순간에 날려 보내고 불길한 예감에 침묵이 흐른다. 잠시잠깐 사이에 사단이 난 것이다. 엄마는 침대에서 꼼짝도 못하고 누워 고통을 신음하고 있었다. “삐융~ 삐융~ 삐융~” 119 소방대원들의 앰블런스에 실려 엄마는 인근 대학병원을 왔으나 엉덩이 골절상으로 딱히 수술을 할 수 없는 부상으로 입원도 치료도 막연한 상황이었다. 두 달 정도 옴짝달싹하지 말고 침대에서 지내야 한다는 의사선생님 말에 집에 모시느냐 병원에 모시느냐 고민하다가 고통을 호소하는 엄마를 마냥 지켜 볼 수만은 없어 병원에 입원하면서 엄마의 일생은 암흑과 고통으로, 가족의 비애가 시작되었다. 입원 일주일째가 되어가도 차도도 없고, 이상한 얘기까지 하시는 엄마를 뵈며 우리가족은 날로 암울해져갔다. 입원 보름 째 더 이상 차도가 없자 가족들과 의논 후 차라리 집에서 모시자고 결론을 내렸다 전혀 거동을 못하는 엄마는 침대에서 소변과 대변은 물론 식사를 해결해야 했다. 퇴원을 해서도 엄마의 이상한 소리는 점점 더 심해지시더니 마침내 치매진단까지 받으셨다. 마른하늘에 날벼락이라더니! 그때 여행을 가지 않았더라면! 오만가지 생각들로 괴로웠다. 한 집안의 가장으로, 맏이로서 어머니를 지켜드리지 못한 것 같은 죄책감까지! 행복과 평화는 사라지고, 매캐한 냄새만이 집안을 휘돌면서 삭막한 공기에 침묵이 대신하고 있었다. 무엇보다 가장 힘든 것은 밤에 잠을 자지 않는 불면증으로 엄마는 날로 병색이 짙어가고 밤낮의 구분이 없는 일상으로 잠깐잠깐 새우잠을 청하다 보니 나는 물론이지만 아내의 야윈 얼굴 깊은 수심을 보노라면 억장이 무너지고 가슴이 아팠다 엄마의 불행이 우리가족의 삶을 송두리째 망가 놓는 걸 절실히 실감하는 순간이다. 기저귀를 갈아드리고 아침밥을 먹이고 틀니를 씻어 드리고 침상에서 몸을 돌려 눕히고 약을 챙겨 드린 후 간식을 챙겨놓고는 이웃 아지매를 모셔놓고서야 마을이장으로 서둘러 집을 나서지만 만나는 사람들마다 엄마 안부에 나는 죄인으로 괴로웠다. 마을일을 보노라니 금방 엄마한테 전화가 왔다. 왜 집에 안오냐고 화를 내시며 보채신다. 기진맥진 온몸이 천근만근으로 돌아와 엄마를 안정시키고 손을 꼭 잡고 잠을 청하는데 눈꺼풀이 한없이 무겁고 피곤한데도 잠이 오지 않는다. 6남매의 장남으로 설을 맞이하여 간만에 온가족이 시골 고향에 모였다. 엄마 문제로 모두가 침통한 분위기속에 내가 말을 꺼냈다. “아우들아! 미안하다. 엄마를 이렇게 만들어.........” “형님! 왜 형님 형수님이 미안해합니까? 우리가 죄송합니다. 엄마 건강하실 때 좀 더 자주 집에 오고 함께 할 걸 이것저것 이유로 형님에게 짐만 주었는데 우리가 형님 형수님에 뭘 할 말이 있겠습니까? 미안해 마세요. 형님 형수님께서 요양병원에 모시든지 병원에 모시든지 형님 형수님 편안한대로 하세요. 저희들도 할 수 있는 금전적인 지원은 당연히 해야지요” 요양보호사 일을 하는 아내가 “그럼 제가 요양병원에 취업하여 엄마를 모실까 해요." 병원비가 부담되었는데 도와주신다니 고맙네요“ 아내도 엄마의 치매증상이 심해지면 요양원이라도 모실 수 있다는 것이 그나마 위안이 되는 모양이다. 그날 우리가족은 좀 더 엄마의 건강 상태를 지켜보고 요양병원에 모시기로 의견을 모았다. 모처럼 엄마 얼굴에 미소가 흐르고 육남매는 무거운 마음으로 명절을 보냈다. 2박 3일 설 연휴가 지나고 모두 떠난 집안은 다시 썰렁해졌다. 새벽 6시 30분 엄청 추운 날씨 차가운 바람에 귓불이 따갑다. 아직 어둠이 가시지 않은 시간이지만 입춘지를 붙이려고 성황당에 갔다. “할배요! 우리 엄마 낫게 도와 주이소” 간절한 소망을 토해내니 마음이 한결 가벼웠다. 성황당 계단 난간에 앉아 고목이 된 느티나무를 바라 보았다. 아버지 사후 힘들 때 마다 나에게 절망하지 말라고 채근하였던 고마운 나무들이다. 2013년 4월 10일 ~ 자신감이 모~락 모~락 요즘 들어 엄마 치매 증세가 심각해졌다. 낯선 행동이 우리를 당황케 하였다. 며칠째 대변을 못 봐 고생하시는 엄마는 오늘도 몇 번이나 대변을 보자고 보채지만 쉽지 않으신가 보다. 엄마의 고통을 지켜보는 내가 답답하고 안타깝다. "엄마 좀만 더, 좀 더~ 힘내! 힘내!" 하면서 엄마를 열심히 응원하지만 대변이 항문에 막혀 더 이상 나오지 않는 상태 급한 나머지 손가락을 항문 깊이 밀어 넣었더니 돌처럼 굳은 대변이 손에 잡힌다. 한 덩어리 두 덩어리 세 덩어리를 뽑아내는 순간 지독한 냄새가 참기 힘들었지만 대변을 파내 드리니 편안해하시는 엄마의 표정에 가슴 뿌듯한 순간이었다. 울 엄마도 나를 진자리 마른자리 갈아 누이며 키우셨을 생각에, 시원하게 대변을 본 엄마가 고맙고 감사해 기분이 좋았다.이글은 치매진단을 받은 엄마를 집에서 모시면서, 하루는 울고 하루는 웃던 날들이 모여 해가 바뀌면서 저 자신의 마음도 조금씩 자라는 걸 느낀 제 마음의 밭입니다. 막막하던 처음보다 마음의 안정도 찾고 긴병에 효자가 없다지만 어머니의 치매로 인해 형제간의 우애가 더 깊어진 것도 같습니다. 엄마의 치매가 다 낫지는 않는다 해도 어머니의 기억 속에 아들은 사라지고 수염이 듬성듬성한 저를 엄마라 부르시더라도 저희 어머니가 계신다는 것만으로 힘이 되는 지난 시간이었던 것 같습니다. 저의 아픔들이 치매를 앓고 계신 또 다른 가족에겐 힘이 되었으면 하는 큰마음으로 부끄러운마음의 조각들을 담았습니다!.
2015년 5월 30일 ~ 엄마의 83번째 생신! 오늘은 엄마의 83세 생신이다. 모내기로 새벽에 아침밥을 먹는데 아내가 찰밥을 차렸다. 주인공 엄마는 아직 곤한 잠을 자는데 아들은 엄마 생신 찰밥을 먹는다. 이제 엄마 생신을 얼마나 더 챙겨드릴 수 있을까? 엄마 생신 찰밥을 차려 주신 아내가 고맙다. 열아홉에 시집와 마흔둘에 청상이 되어 여섯 자식 먹여 살리느라고 아등바등 정신없이 살아 오셨는데 어느새 일거 40년 세월이 꿈결처럼 흘러갔다. 그때 내 나이 스물둘 빈농의 가장으로 지겨운 가난을 벗어나고자 군 제대 후 공무원으로 임용되어 도시생활의 꿈도 이루었지만 결국은 백일몽이 되었고 우선 먹고사는 문제에 봉착한 나는 현실의 벽을 인정하고 긴 세월 고향을 지키며 지금까지 나름대로 열심히 살아왔다. 돌아보면 아쉬움도 있지만 후회는 하지 않는다. 모내기 끝내고 집에 돌아오니 팬티를 세장을 걸쳐 입고 솜바지를 입고 바리바리 보따리 싸놓고 "엄마! 우리 집에 가자!" 보채시는 엄마에게 "응! 내일 돼지하고 숙희가 온데..." 하면서 엄마를 달래 보따리를 풀게 하였다. 저녁에 엄마가 좋아 하시는 삼겹살에 동생들이 보내준 꽃바구니에 케이크에 샴페인을 마셨다. 샴페인을 마시고 기분이 좋은 엄마 “언니는 노래하고 나는 춤추고...” 애창곡 18번을 부른다. 생일축하노래를 부르고 케이크를 자르고 촛불을 끄신 엄마 느닷없이 던지는 한마디 “엄마! 오늘 누구 생일이고?”“........” 묻고 또 묻는다. 난 앞으로 얼마나 더 엄마생신을 챙겨드리는 이상한 엄마가 될 수 있을까? 한편 슬프고 안타깝지만 더 이상 아프지 말고 건강하게 사시길 간절히 소망한다. 2015년 8월 30일 ~ 부끄러운 마음으로 치매투병 2여년간 엄마의 몸 상태는 거동이 불편하지만 실내에서 화장실이며 양치질이며 간단한 일상을 혼자서 척척 해결하니 얼마나 좋은가 아직도 짐을 싸고 집에 가자고 보채지만 엄마와 함께 할 수 있으니 또 얼마나 좋은가! 형제들의 끈끈한 우정이 치매 엄마의 불가능을 가능으로 하루하루 기적을 만들어 간다. 희망의 끈을 놓지 않고 열심히 간병한 덕분에 분명 엄마는 건강을 서서히 찾고 있었다. 가끔 엉뚱한 행동과 말로 우리를 당황하게 하지만 엄마의 무공해 개그로 우리는 하루의 피로를 잊고 웃고 울며 무한 행복으로 살아가고있다. 그동안 엄마를 지켜준 주위에 많은 사람들 요양사님, 보건소 선생님 그리고 복지계 직원 다정한 이웃들에게 모두 모두 고맙고 감사하다는 인사를 전하고 싶다. 엄마! 사랑해! 2015년 8월 31일 이 글은 2015년 9월 15일 경상북도 "광역치매센터" 주관 치매인식개선 수기공모전 "희망, 한걸음"에 출품하여 장려상을 수상한 작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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